소의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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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1698년(숙종 24) 종4품 숙원이 되었다. 당시 숙종은 새로 후궁으로 삼은 유씨를 위해서 큰 돈을 썼는데, 은 4천 냥, 콩 1백 석에 따로 저택을 살 값으로 은 2천 냥을 들였다. 이에 사람들이 나라의 저축이 고갈되고, 민생이 곤궁한데 후궁에게 과하게 베푼다고 근심하였다.[1]
그 이후에도 그녀는 안 좋은 일로 입에 오르내렸다. 1699년(숙종 25)에는 숙안공주 궁방과 유 소의의 궁방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잡이로 걷어 들여 문제가 되자 대신들이 이를 비판하였고, 1707년(숙종 33)에는 삼각산 북쪽 산기슭을 훼손하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비판 받았다. 그러나 숙종이 매번 비호하면서 논란을 덮어주었다.
1699년(숙종 25) 단종 복위를 기념하여 종2품 숙의가 되고, 1702년(숙종 28) 정2품 소의가 되었다.[2]
그녀는 자식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궁 밖에 신주를 두고 노비의 봉공을 받았다. 훗날 정조가 즉위한 다음 왕실의 근검절약을 위해 일체 국고로 이속되었고, 신주는 수진궁으로 옮겨졌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안 좋은 일로 입에 오르내렸다. 1699년(숙종 25)에는 숙안공주 궁방과 유 소의의 궁방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잡이로 걷어 들여 문제가 되자 대신들이 이를 비판하였고, 1707년(숙종 33)에는 삼각산 북쪽 산기슭을 훼손하는 바람에 사헌부로부터 비판 받았다. 그러나 숙종이 매번 비호하면서 논란을 덮어주었다.
1699년(숙종 25) 단종 복위를 기념하여 종2품 숙의가 되고, 1702년(숙종 28) 정2품 소의가 되었다.[2]
그녀는 자식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궁 밖에 신주를 두고 노비의 봉공을 받았다. 훗날 정조가 즉위한 다음 왕실의 근검절약을 위해 일체 국고로 이속되었고, 신주는 수진궁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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